할아버지는 내 마음 속 영원한 독립운동가
추석 한가위 명절은 무엇보다 조상님들의 보살핌에 감사드리며, 후손들에 대한 번성을 기원하는 것이 첫째일 것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아버지를 모시고 형제들끼리 모두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버지를 통해 우리 가족사에 대해 또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입니다.
일제시대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여 가난을 대물림을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형제분께서는 처자식 돌볼 겨를없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온 몸을 바치셨습니다.
추석 한가위 명절 무렵, 경기도 이천 고향에서 아버지쪽 형제들이나 친척들을 만나뵈면
어린시절의 제 눈에 비친 모습에도 친척들은 대개가 못배우고 가난해 보였는데,
왜 우리 집안은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들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어르신이신 큰할아버지(류성근, 1878.4.6- 1942.?)이십니다.
당신께서 독립운동하셨던 자료들이 당시 각종 신문에 증거자료로 많이 남아있었기에 비록 815 해방직후는 아니었어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으셨습니다.
유성근 [柳聖根, 1878~1942]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항일투쟁단체 대한독립야단(大韓獨立野團)의 모험국장을 맡아 단원과 군자금 모집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명은 유성덕(柳成德)이다. 1878년(고종 15) 4월 경기도 이천군 율면 월포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 6월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만주로 건너가 남홍연(南鴻連)이 중국 동삼성에서 조직한 대한독립야단에 가입하였다. 곧 군자금과 단원을 모집하는 일을 담당하는 모험국장에 임명되어 중국 각 지역과 함경북도 무산·길주, 함경남도 단천 등지에서 단원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무산, 길주 등지의 마을을 돌면서 항일 사상을 선전하고 일본 관리들에게 경고문을 발송하였다.
이어서 함경북도 성진, 함경남도 단천, 황해도 은율 등지에서 단원 수십 명을 모집하고 군자금 수천 원을 모금한 후 고향인 이천으로 내려와 군자금 모금 활동을 계속하다가 1921년 5월 말 은신처에서 용강경찰서원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해 8월 중순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2년 6월에 사망하였으며 1982년 정부에서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두산백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나 너무 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훈장은
그나마 경제적 혜택을 받아야 하는 큰할아버지의 직계후손들은 더이상 없었습니다.
큰할아버지의 직계 후손들은 탕진된 가산과 독립운동가 가족으로서 당할 수 밖에 없는 갖은 고초와 핍박...
결국 못배우고 굶주리며 가난하게 남의 소작생활로 근근히 살아가다 대부분 젊은 나이에 일찍 병에 걸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제 할아버지 (류응근, 류병호, 1887.4.6-1957.12.6) 이십니다. 살아계셨으면 124세네요.
할아버지가 인생의 멘토로 생각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따랐던 분이 독립운동가 형님인 큰할아버지(류성근)였다고 합니다.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셨던 큰할아버지(류성근)에 비해
할아버지는 뒤에서 큰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을 도와주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달라시던 큰할아버지의 부탁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할아버지께서는 가지고 있던 전재산을 털어 모든 전답을 담보로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대출 받은 돈을
고스란히 형님께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곤 결과적으로 모든 가산을 탕진하게 되었고, 결국 남아있는 모든 식솔들이 온갖 고초와 가난을 떠안게 됩니다.
그러나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하셔서 언론에도 그 활약상이 소개되었던 큰할아버지(류성근)에 비해,
할아버지(류응근, 류병호)는 뒤에서 큰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활동했던 그 증거자료들을 찾기란 쉽지 않기에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계십니다.
국가보훈처는 당시 (1920년대 - 30년)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돕던 모습을 목격한 증인 둘이 확보되면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8-90년전 일이라 너무 세월이 오래 되어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가셨을텐데 과연 증인이 나타날지도 의문입니다. ㅠㅜ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7남매 중 6번째입니다.
아버지의 형제분들인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그리고 4분의 고모님들은 모두가 독립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한 할아버지로 인해
무학의 학력이 전부일 정도로 배움도 짧고 가난한 세월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증기기관차에 석탄을 나르며 독학으로 중, 고등학교를 나온 배움의 열망이 어떤 형제들 보다 컸던 아버지께서는
그런 가난의 되물림을 끊어버리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직업군인의 길이었던 것은 필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개천표 용이었던 아버지는 형제들 가운데 겨우 생활이 제일 나았던 것 같습니다.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7남매중 6번째였던 아버지는 상이군인 국가유공자입니다.
저는 아들만 5형제중의 막내 아들입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우리 5형제 모두 한자리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면서,
얼마 안있으면 8순이 다 되시는 아버지께서는 살아생전 마지막 평생소원이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이라며,
행여나 우리 가족사들이 후손들에게 잊혀질까 저희들에게 두고두고 기억하라며 또박또박 때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눈가에는 어느덧 눈물이 맺히셨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큰할아버지, 할아버지 형제분들로 인해서,
아버지 세대 그리고 우리 형제들 세대 3대에 걸쳐 우리 가문들은 비록 고생도 많이 하고 넉넉하게는 못살았지만,
그 아래 세대인 다현이, 서현이와 같은 항렬의 조카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명문대학을 진학할 정도로 똑똑한 머리를 가졌습니다.
유전자는 세대를 거듭한다 하더라도 피 속에 계속 흐르나 봅니다.
앞으로의 미래 세대 후손들은 독립운동을 하셨던 조상님들의 후광을 받아 어떤 일을 하던 모두 잘 될 것이란 확신이 듭니다.
비록 할아버지가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댓가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셨던 것도 아닐진대,
저를 비롯해, 다음세대인 다현이 서현이 마음속에는 영원히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의 후손임을 잊지 않고 자부심으로 살아가되,
할아버지 세대 그리고 아버지 세대의 한 많은 인생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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